저는 1년 일정으로 연구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나이 36살 싱글 여성입니다. 학회를 제외하곤, 혼자 사는 것이 처음이며, 외국 거주도 처음입니다. 전 한국에서 진지한 연애는 2번 경험(마지막은 8년전), 성격은 내향적이며 말수는 적고, 지나치게 신중하고 보수적이고 자신에게 엄격한 성격인 듯 합니다. 연애에 관해서는 요령이나 기술이 너무 없는 듯 합니다. 제가 한국인치고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차갑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여자치고는 공감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한 듯, 이성적인 편인 듯 합니다. 그런데, 유독 유럽남자 K에 대해서만은 이성적인 판단이 안되네요. 사실 유럽에 온 뒤 여러 명의 남자들이 들이대는데, 아니라는 생각이 들땐 칼같이 쳐내고 있거든요.

저는 4개월 뒤 귀국해서 일하던 대학에서 교수로 계속 근무할 예정입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업무에 묻혀 살았고, 유럽에 와서 열심히 일하다가 귀국해야지 하던 초기의 의지가 K를 만나게 되면서 바뀌었고, 제 인생관도 조금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양성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했고, 인간적인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솔직녀님의 글을 통해, 연애관계에서 이건 서양식이라 그런거야..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은 다행히 탈피하였습니다.^^

유럽 도착 후 2달간 학교 병원 내 게스트하우스에서 거주하였는데, 병원 내 수녀님의 초대로 채플관 미사에 참석한 것이 현재 K 와의 관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성당 미사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고 미사곡을 부르던 키가 자그마하고 단정한 복장의 소년같은 느낌이 멀리서 바라봤던 그의 첫인상이었습니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이고 조그만 음악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입니다. 그 후 크리스마스 점심식사 모임에 초대를 받았는데, 그 곳에서 그를 처음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모임 참석자는 수녀님 4분, 카톨릭 관계자들, 저, K였습니다. K가 유일하게 저에게 영어로 통역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날 저도 모르게 식사 후 어색해서 단체사진 찍자고 제안했는데, 찍은 사진을 K의 메신저로 보내주기로 하고는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 테이블에 마주 앉아있던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슨 아우라 같은 것이 그의 주변에서 느껴졌고 잠시 멍~해졌었습니다(첫 경험). 그 후, 매주 일요일 오전 미사에 참석했고, 미사 후 짧은 티타임 때 서로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연말, 연초 수녀님들 점심식사에도 초대받았는데 K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녀님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지라 항상 참석했고, 그렇게 몇 번을 같이 식사했습니다.

1월 초 그의 생일 때엔 조금 비싼 목도리와 축하카드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과했던 행동이란 거 알겠습니다.^^; 1월 초에 그의 어린 조카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고, 영어가 서툴던 저는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듣기만 한 것이 아직도 미안합니다.

12월-2월까지 K는 메신저로 매일 한번씩 연락했고, 예를 들면 오늘은 버스가 우회하니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라, 집을 구하는 사이트를 버스에서 봤는데 알려주는 등 유럽사람 특유의 친절함이 묻어나는 정도였습니다. 저는 생일선물 주는 날 아침, 조카 안부를 묻기 위해 한 번 정도 먼저 연락을 했고, 연락이 오면 답을 해주는 정도였습니다.

2월에 제가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사 직전 티타임후 헤어지면서 이사하면 시내에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거라며 이사 후에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는 보드게임을 좋아하는데, 제가 좋아하면 보여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것이 2달 동안 그가 취한 첫 작업이랄까요. 사실 전 2달 간 항상 친절하긴 하지만 사적으로 거의 반응이 없길래 게이인줄 알았습니다. 2달 후 저의 마음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었고, 이사 첫날 밤 뒤숭숭한 마음을 fb에 포스트하니 바로 K로부터 메시지가 와서, 이사했는지?, 이번 주 목요일 저녁에 일 하는지?, 차를 마시거나 게임하러 우리집에 올래?, 라고 제안하더군요. 지금 생각컨대, 첫 넉 달간 K에 대한 판타지에 휩싸여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드게임하러 그의 집에 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저녁을 만들어줘서 함께 먹고, 간단한 보드게임 후 차 한 잔 하자며 갑자기 조명을 어둡게 하더니 소파쪽으로 편안히 마주 앉았습니다. 이 날은 문화충격의 첫날!이었습니다. 과거 자신의 진진한 연애경험 2번(5년, 6년 동거), 2014년 이별, 그 이후의 casual relationship, 종교적으로 몸과 마음이 분리된 행위는 잘못된 건 알지만 난 이미 40세야..라고 하는 그의 갑작스런 사생활 고백에, 저는 거의 어색한 웃음으로만 반응하다가 몸과 마음이 분리된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짧은 반응을 보였을 뿐, 제 머릿속은 이미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유럽의 연애풍토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던 저는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에 빠진 것이었죠. 그리고, 미사 때만 보면서 바르고 건전하고 순수하게 느껴졌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이 날의 모습에 한번 더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를 알지도 못하면서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K는 이런 사람일거다라는 환상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 날 저는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지금 여자친구를 사귈 생각이 있느냐?라는 어리석은 질문만 그에게 했네요. K는 그의 어머니가 꼭 결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면서, 지금은 여자친구 사귈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commitment에 대한 두려움 같은게 있다고 했어요. 제 나이를 묻더니, 20대 중반으로 짐작했는데..라면서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이 후 K는 1주일에 2번씩 메신저로 먼저 연락을 주면서 이틀 저녁은 항상 단둘이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보드게임을 하였습니다. 이 때 저의 느낌은 지난 두 달간 거의 반응이 없던 K가 갑자기 돌진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날 이후로 연애와 관련된 얘기는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네요.

2월 말경, 새로운 게임그룹을 하나 만들 생각이라며 저를 포함해 4명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K, 저, K의 직장 여자동료, K의 여자인 친구. 두 여자인 친구(동료는 8년을 함께한 베스트프렌드, 한명은 3년을 함께 한 친구)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후 두 달간 2주에 한번씩 만나 저녁을 먹고 게임을 했는데, 두 달이 지나면서 차츰 식사 초대 연락이 없고 성당 미사 때 보는 정도로 변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거의 리액션을 하지 않았던게 원인인 듯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현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가 연애와 영어에 서툰 편이고 K 앞에서는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 거의 말을 제대로 못한 점입니다. 다른 친구들과는 편하게 잘 대화하는데, K 앞에만 서면 멍~해진다는.. 제가 생각해도 대화가 자꾸 끊기고, 어색하고, 불편함이 느껴졌는데, K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됩니다. K는 저녁식사와 게임을 통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제공해 준 셈인데, 제가 충분히 그 시간을 대화로 이끌지 못한 것이 문제점이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K의 사적인 연락이 차츰 뜸해지면서 한 두 달 간 저는 향수병같은 증세와 우울 증세를 겪으며 성당 미사에 두 달간 불참했고, 그룹게임에도 불참한다고 메시지를 보내고는 대꾸도 잘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저의 이런 향수병 상태를 제 동료가 수녀님에게 알렸고, 수녀님이 K에게 알려던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그가 저녁먹으러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왔고, 저는 no라고 마음과 반대로 거절했습니다. 얼마 후엔 밖에서 차나 커피나 한 잔 하자고 연락을 주더군요. 처음엔 부담주기 싫다고 고맙지만 사양할께라고 했더니, 얼마 후 다시 커피나 차 한 잔 하자고 연락을 주더군요. 이 때는 대답을 안했습니다. 저는 K를 완전히 잊을 마음으로 연락이 오면 차갑게 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면 안되는 거 알면서, 자꾸 마음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제 자신이 참 못나 보였습니다. 커피를 마시자는 것은 이야기를 하자는 뜻이었을텐데 말이지요. 부담주기 싫다는 저의 답변에 K는 “난 너를 친구(friend)로 생각하고 있고 너와 얘기하고 싶은건데, 왜 네가 나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차나 커피 한 잔 하고 싶으면 알려줘.” 라고 했고, 저는 또 저 friend라는 단어에 우울해했답니다.

거의 두 달 만에 성당 미사에 다시 참석했는데 K가 저를 발견하고는 이전처럼 환한 미소를 보여주더군요. 같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오면서 특별히 왜 안왔었냐..무슨 일 있었냐..등의 질문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하는 일은 어때라고 묻길래, 지난 두 달간 거의 일을 중단했었다라고만 답하고는 또다시 어색한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헤어지기 전에 항상 뭔가 이야기를 좀 하다가 돌아서는데, 솔직히 버스역의 소음과 산만한 분위기로 저는 그의 말을 거의 이해 못하고 그냥 씨익 웃고 돌아서는 일이 반복되었고, 이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게임하러 와야지 하는 그의 말에 그냥 웃기만 하고 bye하고 냉정히 돌아서버린 바보같은 짓을 했네요. 아, K 앞에서의 저의 이 울렁증은 언제쯤 극복이 될까요?

그 후 2주일 뒤 두 수녀님과 K와 함께 한 성당 식사에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와 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제가 유럽과 한국의 ‘정’문화에 대한 차이, 고정관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K의 눈이 유난히 반짝하면서 리액션이 좋더라구요. 생각컨데 토론과 대화를 좋아하는 그의 특성과 통했던 것 같고, 그동안 여러 주제의 대화를 못했던게 새삼 미안하고 아쉽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함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습니다. 이날은 affection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다 헤어졌네요. 물론 K가 주로 이야기하고 한번씩 대화 중 침묵이 흐르고 했지만요.

정리해보면 12월-2월 초까지 제가 계속 먼저 들이대었고, K는 거의 사적으로 반응이 없었으며, 2월 중순-4월까지 그가 계속 먼저 연락을 주고 식사+게임+친구소개+요리정보 제공 등의 친절함을 베풀었고, 아마 식사초대 후의 대화가 더 중요했는데 제가 그 중요한 기회들을 날려버린듯 합니다. 4월부터 서서히 연락이 줄더니 그룹게임이나 미사에서만 만나게 되었고, 6월-8월 초까지 제가 거의 잠수타듯 연락을 끊고 연락이 온 경우 차갑게 대해버렸네요. 그리고 제가 다시 미사에 참석하면서 K의 행동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저한테 집중해준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따로 연락은 없지만요. 아마도, 지난 2달간 향수병에 혼자 힘들어했을 제가 가여워서 좀 더 친절하게 대하는지도 모르겠네요. 고로 저의 부족한 생각과 행동으로 현재의 이 사태가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K와의 대화가 원만했더라면 이런 편지를 보내는 일도 없었겠지요?

제가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저로서는 여전히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워서 도움의 손길을 부탁드리기 위함입니다. 만약 제 친구가 저의 상황이라면 저는 아주 객관적으로 파악이 될 텐데, 제 상황이 되니 정말 판단이 어렵습니다. K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 친구 이상으로 관계가 발전될 여지가 있는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만약 K가 같은 연령(40세)과 직업(음악가)을 가진 한국남자라면, 제가 이만큼 인간적으로 좋아할까?라고 생각해봤습니다만,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여기에 동거경험이 있는 같은 조건의 한국남자라면 무조건 no일겁니다. 유럽문화에서 자란 그에게는 동거가 자연스러운 관계중의 하나였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제가 다중인격인걸까요? 사실 K의 외적인 조건들은 한국인으로 치면 좋은 조건은 아닌듯합니다. 그런데도 전 K가 남자이기 전에 인간적으로 좋습니다. 아마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되면 생각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아마 유럽에서 혼자 살면서 경험한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제 자신이 많이 성숙해지고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금부터 대기 중인 맞선 대상들을 만나서 이럭저럭 가정을 꾸려서 살아갈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과 일상의 소소함을 사랑하게 된 제가 그렇게 살면 잘 살 수 있을까요? 행복하게? 자신있게 대답을 못하겠네요.

K는 10대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 역시 오르간 연주자인데 자폐증이셨고, 어머님이 우울증과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면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지 못한듯 합니다. 평범한 10대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더라구요. 유년기의 이런 경험이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도 영향을 조금은 미쳤으리라 생각되어서 이 친구가 참 애처롭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같이 외출하는 날 말해주더라구요. 저는 아직도 궁금합니다. 이런 사적인 얘기를 서양남자들은 모든 친구들에게 하는지요?

K는 현재 혼자 살고 있으며 작은누나 가족도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 문화가 아주 가족중심적인 문화이더군요. K 스스로 본인은 shy한 성격이고 내성적이라 ‘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하고, 운동이나 활동도 하지만 거의 집안에서 음악 관련 일이나 보드게임하는걸 좋아합니다.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서 식사 만들어주고 게임하는 걸 좋아한다고 하구요. 그동안 K는 자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저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는 그가 질문한 2-3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적인 사항은 얘기해주지 않았는데, 이 부분이 참 아쉽습니다.

그는 항상 if you like, you can come over…라는 식으로 식사나 만남을 제안했었는데, 전 정말 그 표현들이 헷갈립니다. 항상 if you like 또는 if you want를 붙이는데, 제가 가기 싫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책임지기 싫다는 표현인건가요?

정말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는지? 그냥 친구인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생겨나기도 하고, 좋은 친구로 옆에 계속 있어주고 싶기도 하고, 제 마음이 잡히질 않습니다. 확실한건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미래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보통 일의 결과과 좋지 않거나 하지 않는게 좋다라는 솔직녀님의 의견에 100%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K와 다시 대화를 시도해볼까 싶기도 하다가, 자연스레 기회가 오면 해봐야지 하는데, 막상 저는 울렁증으로 얼어붙고, 이제와서 지난 8개월간 내가 가진 궁금증, 충격이었던 문화차이, 나에 대한 생각들을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다시 이야기하는게 관계에 도움이 될지가 의문입니다.

K는 진심으로 저를 대하고 있고 저와 좋은 친구로 장기간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한다는 점은 이제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물어보거나 이야기하면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해주고, 일일이 찾아서 메시지로 링크같은 걸 보내주고, 아주 친절합니다. 그는 지난 8개월간 언제나 일관된 미소로 저를 바라봐주고 저처럼 변덕을 부린 적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단점이나 약점들도 조금씩 파악이 됩니다. 저도 부족한 사람인것처럼요.. 이런 건 말보다는 느낌과 행동으로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친구로 게임에 계속 참여하기만을 원하는 것인지,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 질문은 K에게 해야 하는데 말이죠… 한번은 나한테 왜 이리 친절하냐는 이상한 질문을 제가 그에게 했는데, 그 이후로 어쩐지 더 어색해진 건 사실입니다. 아마도 부담 백배가 되는 질문이었겠죠.

K가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trust)와 소통(communication)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모든 친구에게 친절하다고 얘기하더군요. 저는 그와의 소통에 실패한 느낌입니다. 정말로 좋은 마음으로 저를 도와주고 친구로 옆에 있어주는데, 제가 그 이상의 뭔가를 더 기대하고 스스로 실망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이 시점에,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친구로만 있기에는 솔직히 마음이 힘듭니다. 그리고 기대와는 다른 대답을 듣게되면 실망하게 될 저의 모습이 그려져서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는 용기 없는 제 자신이 바보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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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님이 궁금해 하시고 의아해 하신 서양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도 20대 후반에 미국에 와서 처음엔 미국 사람들의 문화에 좀 놀라기도 하고 우리와 다른 점에 많이 신기해 했습니다. 이젠 뭐 제가 미국 사람이 다 됐지만요. ㅎㅎ 물론 서양 사람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고 개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개인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 평균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람과 비교해서 다른 점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사적인 이야기를 쉽게 하는 편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터부시 되는 주제 (예를 들면 이혼, 별거, 재혼, 병력 등등)는 서구 사회에선 그다지 숨길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친해지면 그런 얘기를 자연스레 하게 되죠. 또 예전 연인이나 헤어진 배우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과하게 옛 애인 얘기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요. 잠시 지나가는 말로, 혹은 하던 얘기에 관련이 있어서 옛 애인 얘기를 꺼내는 건 흔히 볼 수 있답니다.

호감이 가는 상대에게 대시하는 스타일도 좀 다릅니다. 서양 남자들은 내가 호감의 표시를 했는데 상대방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쿨하게 떨어져 나가는 편입니다.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없다’는 한국에서나 통하는 속담이지요. 서양 사람들은 K가 말한대로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구나 라고 여기게 되죠.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직설적이고 속마음과 다른 행동을 잘 하지 않아요. 그래서 연애가 쉬울 수도 있지만 한국식의 마인드로 연애를 하려고 하면 어려워지죠.

그리고 처음부터 사귀려는 마음으로 이성에게 접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가 마음에 들면 일단 친해져 보고 그렇게 친해지고 친구처럼 지내다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물론 섹스면에선 훨씬 개방적이라 친구처럼 지내면서 섹스를 하게 되는 경우도 많구요. 한국 여성분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부분이 이런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관계인듯 해요. 많은 경우 서양 남자의 마음은 친한 친구 단계에 있는 반면, 한국 여자의 마음은 이미 연인 관계의 단계에 들어서 있는거죠. 게다가 더 헷갈리게 되는 이유는 서양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표현을 한국 남자에 비해 훨씬 많이 하기 때문이예요. 사실 그런 표현을 한다고 사귀자는 얘기는 아닌데 말이죠. 좋은건 좋은거고 사귀게 되는 건 큰 commitment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 단계로 넘어가는데엔 신중한 것이 서양 남자들이예요.

님처럼 자신에게 엄격하고 신중한 분들은 남자가 친절하게 대하면 ‘이 남자가 왜 이러지? 나한테 관심이 있나?’ 하면서 지레 긴장하거나 부담을 느끼게 되는데, 서양에선 특별히 이성적인 관심이 없더라도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어요. 제 남편도 그런 편이라 저도 가끔은 좀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남에게 친절한게 욕먹을 일은 아니니까 저도 배우려고 노력중이지요.. ^^; 물론 K의 경우는 님에게 호감도 있어서 더욱 친절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쨋건 그런 친절함을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실 필요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if you want, if you like 같은 표현을 자주 쓰는건 개인 습관인 듯 해요. 저도 그런 식으로 자주 말하는 사람들을 봤는데, 딱히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더라고요. 말하는 쪽에서 강요하는 느낌을 주기 싫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너무 말 한마디 한마디, 단어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그가 ‘원하면 우리 집에 올래?’ 라고 물었을 때 가고 싶으면 가시면 돼고, 뭔가 꺼려지면 안가지면 돼요. 중요한 건 ‘우리 집에 올래?’이지, ‘원하면’이 아니니까요.

자, 이제 님과 K의 관계에 대해 얘길 해보죠. 님이 K에게 기대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친구 이상의 사귀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 다음은요? 미래를 함께할 의향도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결혼을 원하시는 건가요? 유럽에서 사실 의향도 있으신가요? 님의 부모님이나 가족은 어떻게 생각하실지에 대해선 생각해 보셨나요?

물론 지금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자연히 관계가 발전하게 되면 이런 점들에 대해 생각을 안할 수가 없어요. 만약 현재로서 이런 점들에 대한 답을 찾기 힘드시다면 일단은 관계를 발전시키기 보다는 그에 대해 좀더 알아가고 그에게 나를 더 알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와 만약 같이 살게 된다면 행복할 수 있을지, 인생을 바라보는 가치관은 나와 어떻게 다른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등등 내가 진지한 관계를 원할만한 사람인지를 친구로 지내면서 좀더 따져보셨으면 해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도 나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구요. 그와 8개월 정도를 알고 지내셨지만 실제로 같이 보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 사람에게 큰 호감을 느낀다해도, 그건 어쩌면 그에 대해 완전히 알기 이전에 생긴 호감일수도 있거든요.

그가 한국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괜찮은 배우자감인지 아닌지, 그런 고민을 하시기엔 아직 너무 일러요. 아직은 그와 사귄다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요.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와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되기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으세요. 좀더 친구로서 같이 시간을 보내보세요. 이 남자와 잘 될 가능성은 없다라는 생각으로 그를 대하면 오히려 편하게 그를 대하실 수 있을거예요.

남녀 사이엔 꼭 사귀는 사이, 그러다가 결혼하게 되는 사이만 존재하는 건 아니예요. 남녀 간에도 영원히 친구로 지낼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고 평생의 파트너로 살아갈 수도 있어요. 두 사람이 정말로 마음이 맞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가 합의하는 한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는거예요. 그 관계가 친구관계든, 동거관계든, 결혼이든 말이죠.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원하는 바가 같아야 한다는거죠. 그건 두 사람이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충분한 대화를 나누어야 알 수가 있어요. 지금 님은 그런 단계를 전혀 거치지 않고 혼자서 고민을 하고 계신다고 봐요.

긴 시간 고민 끝에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신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비슷한 고민의 이메일을 주시는 분들도 꽤 많구요. 그럴 때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의 답변을 해드리려고 노력합니다만, 제가 제일 해드리고 싶은 말은 사실 이거예요.

정답을 찾으려고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고민하기 보다는 내 마음이 가는대로 해보세요.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거절당할까,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행동으로 못 옮기는 분들은 평생 배울 수가 없어요. 모든게 그렇잖아요. 실패를 겪으면서 배우는 거고, 시험을 보고 틀려보면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거죠. 연애도 그래요. 실제로 부딪혀보고 거절도 당해보고 해야 남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고 더 나은 연애를 할 수 있게 되는거예요. 항상 겁을 먹고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끝내기를 반복하다보면 그 이상의 발전이 없어요. 아무리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연애 고수들의 얘기를 읽으면서 공부한다 해도, 모든 사람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 경험해 보는 것만큼 효과있는 연애 교습은 없어요.

부디 K와 더 많은 시간과 대화 나누실 수 있기를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