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해외에서 오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지내면서 그 곳에서 제가 외국 여자라는 이유로 쉽게 접근하던 현지인들과 현지 한국인들에 상처 받았던 적도 많았고, 그러다보니 저도 더더욱 닫히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마음을 안 열고 가볍게 만나거나 거부했어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큰 믿음을 주는 사람이 생겼어요. 한국에 의지할 가족도 없고 여기서도 혼자라는 생각에 항상 외로웠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 저에게도 항상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가족이 생긴 것 같아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렇게 책임감 있는 척 다가와서 사랑한다며 자기한테만 의지하라던 그 사람이 잠자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마음이 식었다며 저에게 메신저로 통보를 하고 잠수를 탔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의지할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면서 꺼지라는 말과 함께 여자로써 정말 저를 무너지게 하는 막말들을 했고, 전 그 때 그의 표정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실 전 어렸을 때 사랑하는 아빠를 병으로 잃었고 그 때 아빠 곁에서 죽음의 과정을 다 지켜보면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습니다. 그건 저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으며 그 얘길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정신적으로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고, 그래서인지 남자와 이별할 때 그 사람과 사별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대로 헤어지면 나는 못한 말도 많고 못한 것도 너무 많고 영원히 볼 수 없을거란 생각에 너무 힘듭니다. 살아있으면 못할게 없는데 내 잘못 만으로 헤어지는 것 같고.. 남들이 보기엔 그냥 남녀가 헤어지는 것일텐데 말이죠. 심지어 이번이 첫번째 이별도 아닌데 그에게 너무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충격이 더 강했고, 수 개월동안 우울감에 지옥에서 살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열심히 죽어라 노력해서 들어간 대기업이었는데 다 접고 들어오게 되었어요. 그걸 제 손으로 다 그만두고 귀국하던 날도 못 잊을 것 같아요.

한국에 온 지 두 달이 지나고 저도 그 때보다 안정되긴 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증오감을 못 지우겠어요.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겠는데 그 사람이 자꾸 목을 조르려 쫓아다니고 저는 울면서 도망다니고 숨어있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이런 적은 처음인데 남자 자체가 무섭고 역겹고 구역질이 나요. 키스와 성관계를 떠올리면 소름이 돋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잘 살고 있는데, 힘들게 시작한 좋은 커리어를 다 뿌리치고 한국에 돌아와 눈을 낮춰 취업 준비나 하고 있는 제 자신도 너무 한심합니다. 남자친구,결혼 등등 행복한 생활은 저에게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져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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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사연과 같은 고민들을 읽을 때마다 제가 과연 얼마만큼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답니다. 전 그럴만한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얼마나 힘드셨으면 생면부지의 저에게 이렇게 털어놓고 싶으셨을지 그 마음이 저에게도 와 닿아서 비록 제 답변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위안을 드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답변을 씁니다.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은 전혀 님의 잘못이 아니예요. 님에게 이별이 좀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더욱 이별 뒤의 상처가 크겠지만, 꼭 명심해주셨으면 하는 점은 누군가와 헤어지게 되는 것이 님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이예요. 저도 20대엔 이별이 힘들었어요. 며칠을 울고, 계속 그 사람 생각이 나고,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물론 님에게 상처를 준 그 남자 같은 나쁜 남자를 만난 적은 운좋게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별은 힘들었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면서 깨닫게 됐죠. 누구를 만나서 연애를 하든 나 스스로 설 수 없고 강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끌려다니게 된다는 사실을요.

님에게 수많은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실 수 있는 분들이 (저를 포함) 어딘가에 계실거예요. 위로와 격려는 잠시 힘이 되고 마음을 달래주죠. 하지만 지금의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좋은 사람 만나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직해서 커리어를 쌓으려면, 결국 님이 강해져야 할 수 밖에 없어요.

혼자서 강해지기는 물론 쉽지 않아요. 어떤 분들은 심리치료사나 상담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친구나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죠. 주변에 누구든 수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큰 힘이 될거예요.

님보다 20년을 더 산 제 입장에서 선배로서 몇가지 조언을 해드리자면요,

1. 여자를 막 대하는 남자, 막말하는 남자는 절대로 만날 가치가 없어요. 그런 남자라면 일찌감치 헤어지게 된 것에 감사하세요.

2. 누구를 사귀든 이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나세요. 한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아무리 사랑해도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고, 어떤 사랑은 몇 년 뒤에 바래서 이별로 이어지기도 하죠. 인생에서 이별은 생각보다 흔하게 일어나는 이벤트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죽음이 아닌 이상 어떤 이별도 재회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믿으세요. 세상은 넒지만 의외로 좁기도 해요. 때문에 이별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래요.

3.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예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거예요.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되지 못한다해도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4. 연애와 결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걸 포기하지는 마세요. 세상엔 좋은 남자들도 많고 님과 잘 맞는 사람도 분명 어디엔가 있을거예요. 그러니까 외롭다고 아무 남자에게 의지하고 맞춰주지 마세요. 님과 정말로 잘 맞고 님을 한 인간으로 존중해 주는 남자를 만날 때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5. 평생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가정해보고 그러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해 보세요. 지금은 나 혼자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예요. 좋은 직장을 버리고 귀국해 지금은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누구나 살면서 그런 순간을 적어도 한 번은 겪게 돼요.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를 걱정하지 마시고, 앞으로 나 혼자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세요. 비록 지금은 100프로 만족스러운 직장, 직업이 아니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내가 포기했던 그런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분명 올 거예요.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하죠. 그 말이 정말 맞아요. 길게 보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님의 모든 고민과 아픈 상처를 치유해 드릴 수는 없지만 제 답변이 조금이나마 힘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부디 취업준비도 잘 하시고 그 사람의 악몽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시길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