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업데이트를 자주 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계속 들러주시고 고민 상담을 해오신다. 그런데 최근 몇 달 간 받은 고민들 중 다수가 외국 남자와 사귀게 된 한국 여성분들의 고민이었다. 확실히 요즘은 외국에 나와 계신 분들도 많고 한국에서도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많아졌나보다. 그 분들의 엇비슷한 사연을 일일이 올리기 보다는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워하는 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사연의 주인공분들이 모두 외국 중에서도 미주나 서유럽권 나라 출신의 남자들과 사귀고 계시고, 나 역시 주로 보고 듣고 접하는 사람들이 미주나 유럽권 사람들이니 이 글에선 ‘외국’ 대신 ‘서양’이라고 한정지어 말하겠다.)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의 이성교제는 이런 식이다.

1.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호감을 느낀다.
2.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몇 번 더 만나본다. 보통은 이 기간이 한 달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3. 만약 두 사람의 감정이 그저 그런 호감 정도라면 몇 번 만난뒤에 흐지부지 끝나게 된다. 아니면 둘 중 한 사람이 사귀자고 제안한다. 보통은 호감이 더 있는 사람 쪽에서 제안을 한다.
4. 상대방이 동의하면 사귀는 관계, 연인 관계가 된다.
5. 본격적인 스킨쉽을 하게 된다. (요즘은 스킨쉽이 2-3번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반면 서양의 이성교제를 이런 식으로 단순화시켜 보면 이렇다.

1.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호감을 느낀다.
2.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몇 번 더 만나본다. 이 단계에서 스킨십이 이루어지고 섹스까지 가는 경우가 흔하다.
3. 2번 단계가 보통 한 달 이상 지속된다. 서너 달 이런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 단계로 일년 이상 가기도 한다.
4. 두 사람이 2번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에 동의하면 사귀는 관계, 연인 관계가 된다. 섹스를 거치지 않고 이 단계까지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 여성이 서양 남자와 사귀면서 힘들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2번 단계, 즉 사귀기 전에 간 보는 사이, 썸 타는 사이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한국 남자와 만나면 이 단계가 길게 지속되는 경우는 별로 없고, 좋으면 사귀자, 아니면 그만 만나자, 한 달 안에 확실하게 관계가 정리되는 반면, 서양 남자는 나에게 잘해주고 내 연인처럼 굴지만, 확실하게 우리가 사귀는 사이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몇 달이 흘러가는거다. 서양 사람들의 이성교제 패턴을 알고 있다면 이 단계가 많이 힘들지 않겠지만, 연애 경험이 별로 없고, 특히나 서양 남자를 처음 사귀는 한국 여성이라면 이 단계가 당연히 힘들 수 밖에.

나도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미국 남자와 데이트를 했을 때 헷갈렸었다. 회사 파티에서 만나게 된 내 동료의 친구가 그 뒤에 동료를 통해 나에게 연락을 했다. 같이 연극보러 가지 않겠냐고. 난 당연히 그 남자가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같이 연극을 보고 좋은데서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다. 그 뒤로 일주일에 2-3번은 그와 만나서 시간을 보내게 됐고 주말에도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그의 친구들과 만날 때도 나를 초대하는 일이 늘어갔다. 그렇게 두 세 달을 그와 만나면서 우리는 스킨십도 했고 섹스도 했고 난 자연히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를 자기 지인들에게 소개할 때 한 번도 ‘내 여자친구’라고 소개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내 친구’라고 나를 소개했고, 난 그게 이상했다. 도대체 우린 무슨 사이인거지?

그래서 석 달이 채 지나가기 전에 그에게 물어봤다. ‘나는 너에게 뭐니? 내가 너의 여자친구니, 아니니?’ 그랬더니 그는 무척이나 당황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난 널 많이 좋아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너무 좋아. 그렇지만 아직 누군가와 진지하게 사귈 준비는 안되어 있어. 네가 원하는 관계가 진지하게 사귀는 관계, 연인 관계라면 난 너와 더 이상 데이트를 할 수가 없어. 그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게 아니니까. 하지만 난 널 인간적으로 무지 좋아하고 친구로서 널 잃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듣는 순간 황당했고 화가 났다. 그래, 나랑 그냥 재미는 보고 싶은데 사귀고 싶지는 않다 이거지. 그 때는 그 친구와 다시 볼 일이 없겠다라고 생각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며칠뒤에 그는 또 연락을 했고 저녁 초대를 했다. 첨엔 거절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그를 피할 이유가 있을까 싶어 다시 만났다.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스킨십을 전혀 하지 않고 나를 정말로 친구로만 대했다. 그렇게 우린 나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길 때까지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 사이로 지냈다.

돌이켜보면 그 때 나도 썸타는 단계에서 한국식으로 생각을 했던거다. 그런데 오랜 싱글 생활을 거치고 데이트도 많이 해보면서 서양식의 데이트 문화가 훨씬 합리적이고 덜 위험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한국식 데이트 문화 안에선 상대방을 오랜 기간 (적어도 일년 이상) 만나면서 제대로 파악하려면 일단 커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커플이 되면 다른 이성을 만날 수 없으니 커플인 기간 동안엔 한 상대에게 묶인다는 얘기다. 게다가 일단 커플이 되면 아무래도 서로에게 익숙해지게 되고, 그래서 상대방의 단점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서양 사람들은 커플이 되기까지 훨씬 신중한 편이다. 데이트도 여러 번 하고, 주말을 하루 종일 같이 보내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은지 보고, 내 친구들, 가족들과 만날 때 어색하지 않은지 보고, 싸울 일이 있을 때 서로 잘 타협하고 해결하는지 보고, 섹스가 잘 맞는지 보고, 한국 사람들은 상견례가 닥쳐서야 따져보게 되는 그런 모든 것들을 커플이 되기 전에 테스트 해본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과 정말 잘 맞는구나라는 확신이 들면 공식적인 커플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데이트 문화의 차이는 미혼 남녀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 때문에도 비롯된다. 한국에선 사귀는 사람이 없는 성인 남녀를 가만히 두질 않는 반면, 싱글 남녀가 여러 이성과 만나고 데이트 하는 것을 달갑게 보지도 않는다. 한 사람과 진득하게 만나다가 결혼하는 것만이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진다. 서양의 싱글족들은 그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다. 주변에서 왈가왈부하지 않으니 내 맘에 꼭 드는 사람을 만나기 전엔 여러 사람과 만나보고 데이트 해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 사회 분위기 때문에도 서양 사람들은 연애를 하면서 시간에 덜 구애받는다.

서양 남자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 여성분들께 이런 한국과 서양의 데이트 방식의 차이에 더불어 드리고 싶은 조언이 몇가지 더 있다.

1.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는데, 나도 그에게 호감이 있다면 호감을 표시할 것.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고백을 안할까?’ 이건 지극히 한국식 마인드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그는 이미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했고, 그 이상을 지금 기대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당신도 그를 좋아한다면 그에게 호감을 표시해야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서양 남자는 자기에게 호감을 표시하지 않는 여자에게 계속 대시하지 않는 편이다.

2. 상대방과 사귀는 관계로 발전하길 원하기 이전에 왜 그 사람과 사귀고 싶은지, 장기적으로 사귈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답이 있는가?
서양 남자를 처음 대하면 호기심에서, 그리고 색다름 때문에 그 남자에 대해 잘 모른채 끌려들게 될 수 있다. 그 사람의 성격, 가족사항, 직장, 미래의 계획, 친구 관계, 건강문제, 등등에 대해 자세히 알기 전에 사귀는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금물이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을 그 정도로 자세히 알게 되려면 최소한 수 개월은 걸린다고 본다. 때문에 만난지 처음 서너 달은 느긋한 마음으로 상대방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3. 내가 기대하는 관계에 대해 상대방에게 알려줄 것.
상대방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확실해졌다면, 내가 기대하는 다음 단계에 대해 상대방에게 말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주기 만을 기다리다가 당신이 원하는 관계로 영영 발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할까봐 내 생각을 분명하게 상대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것만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4. 섹스와 사귀는 건 별개임을 기억할 것.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양 사람들에게 섹스는 사귀는 관계로 발전하기 전 데이트와 같은 한 과정이지, 섹스를 했다고 그것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섹스를 자주한다고 해서 그 두 사람이 사귀는 관계로 발전할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다. 섹스하는 사이 = 심각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

꼭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는 연애만이 가치있는 건 아니다. 누구를 만나든, 길게 만나든 짧게 만나든, 그 시간이 즐거웠건 지루했건, 지나고 보면 다 무엇인가 나에게 가르쳐준 중요한 경험이자 추억으로 남는다. 때문에 상대방과 나를 어떤 관계로 정의하려고 하기 보다는 충분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즐기고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느낄 때까진 초조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