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현재 유럽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십대 중반의 학생입니다. 제 남자친구는 저보다 두 살 많은 유럽 남자로 만난지 약 8개월 정도 되었어요. 힘들고 외로운 유학생활에서 남자친구는 여러모로 큰 힘이 되어주었죠. 그는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저를 자신의 부모님 댁이나 오래된 고향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스스럼없이 데리고 갔습니다. 행복하기만한 그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싹트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모르게 저 혼자 가진 문제입니다.

처음엔 고등학교때부터 맺어진 많은 인연들을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이어오고 있다는 게 그의 매우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못해도 일주일에 한 두번은 친구들을 만나고 만나면 또 워낙 즐겁고 쾌활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좋아보였고, 저도 그의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이기까지 했죠. 문제는 제가 그가 여자인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그 친구들과 스킨십을 많이 한다거나 의심될 만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괜히 마음이 심란합니다. 특히 그들 중 D라는 여자와 유달리 친해 보여서 질투가 좀 많이 납니다. 그는 주로 여러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편이지만, D와는 가끔 단 둘이 만나는 때도 있고 지난 번엔 D의 집에 혼자 저녁을 먹으러 간 적도 있습니다. 어쨌든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그녀는 거의 항상 함께하니 그녀를 자주 만나는 건 확실하고, 그녀와 문자도 거의 매일 주고 받는 듯 보입니다.

물론 그녀를 만나는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만난다고 말을 하고 저는 그럴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고 말하죠. 제가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와 만나서 한 일을 대강 말해주고, 친구들이랑 만나도 그들과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줍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사실들로는 제가 딱히 그녀를 질투할 이유도 그를 의심할 여지도 없는데, 저는 왜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사귄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까지 있고, 그도 여자친구인 제가 있고, 저를 많이 좋아해 주고 있는데 말이죠.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제가 질투를 느끼고 의심이 드는 데엔 사실 여러 이유가 있어요. 일단 남자친구의 친구들의 관계가 제 상식 밖으로 몹시 자유스럽다는 점입니다. 이곳 문화가 그러니 저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은 하지만, 서로 사귀다가 헤어져도 다시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친구로 지내는 그들의 관계는 좀처럼 납득하기 힘듭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온 막역한 친구 사이라는건 알지만 아무래도 남녀라는 성차이가 자꾸 걸려요. 남자친구가 그 친구들 중 과거 누구와 사귀었던 사이었는지, 저로서는 모르는거잖아요. 물론 과거 사귀었던 사이라는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여튼 말만 친구들이지, 잠재적으로 언제든 눈 맞으면 사귈 수 있는 애매한 관계들만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그 이성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하고 이젠 그런 그가 밉기까지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친에게 이와 관련해 티를 내는 건 커녕,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제 자신이 괴롭습니다. 제가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온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이 곳의 문화라면 문화라고 할 것에 잘 적응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네요. 이런 솔직한 생각들을 남친에게 털어 놓으면 속좁고 쿨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요. 무엇보다 남친이 사랑하는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니 잘못 건드렸다간 겉잡을 수 없이 감정이 상하는 일이 발생할까 두렵습니다. 점점 이렇게 혼자 쌓아두기만 하다가는 언젠가는 폭발할 것만 같아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용기가 나질 않고, 어떻게 잘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맘이 이렇다보니 그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어려워요. 그 친구들은 다들 직장인이고 성격적으로도 저랑은 많이 달라요. 언어, 나이, 국적, 신분, 관심사 등등 어느 하나 잘 맞는 걸 찾기도 힘드네요. 남친이라는 공통분모를 제외하면 친해지기에 어려운 관계랄까요. 저 빼고는 다들 십 년 이상 알고 지내온 친구들인지라 모이면 제가 모르는 옛날 얘기도 빠지지 않구요. 전 자연스레 좀 소외감도 들고 지루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제가 불편해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남친은 제가 자기 친구들과 잘 어울리길 바라는 눈치에요. 제게 전혀 강요는 하지 않지만 남친의 기대를 아니까 저도 노력은 하는데… 저는 남친에게 영영 그 친구들보다 우선 순위가 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프기도 합니다. 십 년이 넘는 세월과 고작 팔 개월의 시간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그 오랜 친구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이해가 가지만, 뭔가 한 참 뒤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그의 이성 친구들, 특히 D라는 특정 친구에게 느끼는 질투는 합당한 걸까요? 이 질투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의 친구들과의 관계, 제가 조금 더 노력해야 하는 걸까요? 무던해지려 노력해봐도 마음이 쓰이고 괴롭기만 합니다. 이 문제들이 멀쩡한 남자친구와 저의 관계를 점점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해결을 하고 싶어요.

남자친구의 이성친구 문제는 항상 여자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항이죠. 일단 님의 고민에 대한 답변을 드리기 전에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이성간에 얼마든지 친구 관계가 가능하고 헤어진 연인과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예요. 아마도 남녀공학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남자인 친구들이 꽤 많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남자 동료들과도 친구처럼 지낸 경험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지금도 그들을 다시 만나면 스스럼 없는 친구처럼 대하구요. 그래도 한국에 살 땐 그런 이성친구들과 단 둘이만 만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주로 여러 명이 같이 만나서 놀았던 적이 많았죠. 미국에 온 뒤엔 이성친구나 동성친구나 별로 다를 바 없이 대하는 미국애들을 보면서 이성인 친구라는 개념이 전혀 특별하지 않게 되었구요. 그리고 잠시 사귀던 남자와 친구가 되기도 했구요.

하지만 저도 제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친구가 여자인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엔 마냥 편하지많은 않았어요. 여자인 친구들 중에 유달리 친해보이는 친구는 없었지만, 그래도 둘이 만난다고 하면 좀 걱정이 되더라구요. 제 남친은 딴 여자와 무슨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여자가 유혹하면 넘어갈 수도 있는게 남자니까, 그래서 사실 걱정이 됐더랬죠. 혹시나 여자애들이 괜히 꼬리치거나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이랬어요. 일단 남친과 여자인 친구들의 관계가 어떤 성격의 관계인지를 다 물어봤어요. 한 명 씩 새로운 여자인 친구들을 알게 될 때마다, 걔랑은 어떻게 언제 알게 된 사이야? 지금 걔는 뭐하는데? 걘 남자친구있어? 걔랑 사귄 적도 있어? (만약 사귄 적이 있다면) 근데 왜 헤어졌어? 얼마나 사귀었어? 등등의 질문을 했죠. 그렇게 그 여자에 대해서 알게 되면 왠지 모르게 걱정이 덜 되더군요. 그런 질문에 대한 남친의 답변 끝에는 항상 ‘걱정하지마. 난 너만 사랑하고, 다른 여자들은 다 그냥 친구일 뿐이야.’ 뭐 이런 식의 립서비스가 따라붙었지요. 물론 그 말을 믿었지만, 그래도 남친이 여자인 친구와 둘이만 만나는 것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시도하게 된건 걱정하기 보다는 그의 여자인 친구들을 내 편으로 만들기 였죠.

그가 여자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전 항상 나도 같이 만나자고 제안했고 남친도 그게 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순순히 동의했죠. 그렇게 전 그의 여자인 친구들을 몇 명 만난 적이 있어요. 그녀들도 나를 알게 되고 우리 둘이 얼마나 사이가 좋고 잘 맞는지를 보고 나서는 저를 친구처럼 대하더라구요. 물론 아무래도 정말 친구가 될만큼 서로를 잘 알 시간은 없었지만요. 그렇게 한 두 번 같이 만나고 나니 더 이상 제 남친에게 얼굴보자는 얘기도 별로 안하고, 그냥 가끔 안부나 묻는 사이가 되더군요.

제 남편은 제가 그렇게 다른 여자친구들과 만나는 것에 질투한다고 제가 속이 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자기도 내가 이성친구와 단둘이 만나면 질투심이 생기다면서요. 하지만 그렇다고 만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것이 내가 그 사람과 나쁜 짓을 하려고 만나는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내가 같이 만나자고 하면 고맙대요. 자기 걱정안하게 해줘서. 그래서 저희 둘은 서로의 이성친구를 만날 땐 꼭 부부 동반을 해요.

서론인 제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저는 비슷한 경우를 이런 식으로 극복했지만, 제 배경과 경험은 님과는 많이 다를 수 있고, 때문에 제 얘기를 좀 길게 한거예요. 님이 스스로를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왔다고 하셨기에 주변에 이성인 친구가 없거나 그런 경우를 많이 보지 못하셨다고 짐작을 하고 말씀을 드릴께요.

일단은 님이 지금까지 혼자 마음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던 고민을 남자친구에게 얘기하셔야 해요. 지금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쿨한 척을 해오셨다고 하셨는데, 더 늦기 전에 말을 하세요. 님이 완전히 님의 사고방식과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이 문제로 님은 계속 가슴앓이를 하게 될텐데, 그런 속을 남자친구는 전혀 모르고 있다면 두 분이 사귀는 동안 님 혼자만 힘들어지게 되니까요. 그럼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요.

제 생각엔 문화적인 차이점을 얘기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너에게 얘기 안했지만 사실 한국에선 남여 사이에 친구 관계가 여기서처럼 흔하지 않고, 나도 그런 경험이 없어서 네가 여자인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진다, 더욱이 예전 연인과 친구로 지내는 것은 한국에선 거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너의 그런 친구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얘기를 하세요.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네 친구들과 만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단 네가 단둘이 이성친구와 만난다거나 내 앞에서 이성친구들과 스킨십을 하거나 할 때 마다 내가 좀 힘들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세요. 그렇게 얘기를 해도 남자친구가 당장 친구들을 대하는 방식을 바꾸지는 못할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님이 어떤 마음인지는 알게 되고, 때문에 님을 사랑하는 남자친구라면 조금은 조심하게 될거예요.

남자친구에게 속마음을 얘기하기, 이게 첫번째로 님이 하셔야 될 일이구요, 그 뒤엔 다른 문화적인 차이에 대해 남자친구와 폭넓은 대화를 자주 나누도록 하세요. 지금까지 만약 님이 그곳 문화에 익숙해지려는데에만 열중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그에게 한국 문화는 이렇게 다르다라는 것을 여러 면에서 상기시켜주세요. 이성간의 친구관계 뿐만 아니라 데이트 문화도 다르고, 결혼 문화도 다르고, 부모 자식 관계도 다르고, 학교나 직장에서의 문화도 많이 다르죠. 좋아하는 사람과는 비슷해지고 싶고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기를 누구나 바라죠. 하지만 이미 두 분이 어느 정도 안정된 연애 관계에 들어섰다면 서로 다른 점, 특히나 태어나 자란 나라가 전혀 다른 경우엔 두 나라의 문화적 사회적 차이에 대해 서로 공유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쿨한 것과 쿨한 척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랍니다. 님이 쿨해 보이고 싶어서 속을 털어놓지 못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건 전혀 최선책이 아니예요. 정말로 쿨해지고 싶다면 이성간의 친구 관계나 전여친과 친구로 지내는 것을 이상한 일이 아닌,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D라는 특정 친구에 대해서도 질투하지 않을만큼 남자친구를 믿고 님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도 필요하구요. 완전히 그렇게 되기까진 너무 쿨한척 하지 마시고, 제가 말씀드린대로 껄끄러운 심정을 남자친구에게 알려주세요.

남자들에게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남자들마다 차이가 있어요. 친구들이 싫어하는 여자라면 포기하는 남자도 있고, 친구보다 사랑하는 여자 말에 껌벅 죽는 남자도 있구요. 님의 남자친구는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 많고 그들과 자주 만나는 것으로 보아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자인 듯 한데, 그런 남자친구에게 있어 님이 그의 친구들보다 우선 순위가 되려면 그 친구들이 님을 좋아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님을 꼭 친구로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 친구가 사귈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구나, 내 친구를 행복하게 해 줄수 있는 여자구나, 이렇게 생각하게끔 만들라는 얘기예요. 친구들이 그렇게 여기면 남자친구와 님과의 관계가 잘 되기를 그들도 바라게 되고, 님에게 좀더 호의적이 되죠.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친구라고 님도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을 적으로 만들기 보다는 내 편으로 만들 필요는 충분히 있어요. 그러려면 지루하고 재미없는 모임에 나가서 웃어줄 필요도 있구요. 그리고 자꾸 그들과 어울리다보면 남자친구의 이성친구들도 좀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을거예요.

끝으로 님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의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님의 남자친구와 더 깊은 관계, 나아가 결혼까지도 생각하는 관계가 되려면, 그도 님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해요. 두 사람이 모두 그렇게 다른 배경에서 자라온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고, 조금씩 그런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해 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힘들게 될 수 밖에 없어요.

남자친구에게 조금은 솔직해지세요. 연인 사이, 부부 사이에 솔직해 질 수 없다는 것만큼 큰 위험요소는 없어요. 당장은 솔직하게 말하기가 힘들고 그로 인해 상처받을까봐 두려워도 솔직해진 뒤의 후유증은 장기적으로 훨씬 이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