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끔 짜증나고 우울하고 별 이유없이 기분이 꿀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투정을 부릴 때가 있다. 난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는, 좋게 말하면 아주 안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감정이 무딘 사람인데, 그런 내가 며칠 전 기분이 갑자기 심하게 다운되어 S에게 투덜댔다. 무슨 일이었냐면..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S의 전화를 받았다.
S: 지금 집에 가려구 해. 근데 집에 뭐 먹을거 있어?
나: 글쎄.. 바로 먹을건 없구 요리를 해야 되는데..
S: 요리해서 먹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텐데.. 나 너무 늦지 않게 운동하러 가고 싶거든. 자긴 뭐 먹을건데?
나: 나야 뭐 별로 배 안고프니까 아무거나 조금 먹으면 될 거 같은데.. 그럼 간단한거 뭐 사먹을까?
S: 우리 지난 주에 돈 많이 썼으니까 사먹는건 좀 그래.
나: 그래 그럼..
S: 알았어. 일단 가면서 생각해 볼께.

그리곤 내가 집에 들어온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S: 그냥 가는 길에 Red Mill (우리 동네에서 유명한 햄버거집)에 들려서 치킨 샌드위치 사갈래. 뭐 사다 줄까?
나: 아니, 됐어.
S: 오케이. 그럼 좀 이따 봐.

그리곤 집에 샌드위치를 들고 들어온 S를 우울모드로 맞이 했다. 같이 운동하러 가기로 했었지만 난 기분이 완전 꿀꿀해져서 결국 침대에 누워버렸다.
나: 나 운동하러 안 갈래.
S: 그럼 나도 안가고 옆에 있어줄께.
나: 아냐, 운동하러 가. 옆에 있어줘도 별로 도움 안될거야. 나 정말 괜찮어.
S: 운동은 내일도 갈 수 있어. 내 와이프가 우울하니 내가 어떻게든 도와줘야지.
나: 힝.. 그럼 내가 미안하잖어.
S: 뭐가 미안해. 네가 나 뱃속 안 좋아서 고생할 때마다 참아주는거에 비하면 넌 아주 가끔 이렇잖아.
나: 근데 나 정말 기분이 왜 이렇게 안좋은거지? 이렇게 우울할 이유가 없는데..
S: 정말 아무 일 없었어?
나: 어. 버스에서도 기분 괜찮았구.. 집에 와서 갑자기 기분이 다운됐어.
S: 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혹시 오는 길에 무슨 생각을 한거야?
나: 아닌데..

그걸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왜 내 기분이 그런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내 자신을 싫어하게 될 것 같아 곰곰히 생각했다. 무엇때문에 내가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퇴근할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짜증이 나게 된거지? 그렇게 생각한 끝에 드디어 나의 짜증의 원인을 찾아냈다….

나는 집보다는 밖에서 돌아다니거나 노는걸 좋아하고, 뭘 먹어도 밖에서 먹는걸 더 좋아한다. S가 사먹지 말자고 하고는 햄버거집에 간다고 했을 때, 내 머리속에선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을거다. ‘그럼 같이 사먹으러 갈 수도 있었는데..뭐야. 이렇게 날씨 좋은 날, 사와서 집에서 먹긴 싫다구. 그리구 난 이미 뭐 먹어서 더 먹기도 힘들구.. 치.. 혼자만 맛있는거 먹구.’ 완전 유치한 이런 생각들 – 그 당시엔 물론 인식하지 못했지만 – 이 내 감정을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이 얘기를 S에게 하니 박장대소를 한다.
S: 정말? 하하하.. 뭐야. 나 혼자 맛있는거 먹어서 화난거야? 하긴 넌 내가 너보다 재밌는 시간을 보내는것도 못 참지.
나: 내가 언제 그랬냐? …. 아, 그랬지.. ㅎㅎ

한 번은 내 동창 모임이 있어서 S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자긴 돈도 아낄겸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친구랑 맥주 한 잔 하고 집에 일찍 갈거라고.. 그러려니 하고는 동창 모임이 끝날 무렵, 9시쯤 전화를 해봤다. 혹시라도 집에 가는 길에 뭐 먹고 싶은거 있으면 사다주려고. 전화를 받는데 엄청 시끌시끌한 배경 사운드가 들린다.

나: 지금 어디야?
S: 어, 저스틴이랑 한 잔 하고 있는데 G를 우연히 만나서 걔 따라 2차를 갔거든. 근데 거기에 니 친구들이 또 우르르 있길래 걔네랑 마시다가 지금 3차 왔어.
나: 집에 언제 올거야?
S: 지금 마시는 잔만 마시고 갈께. 집에서 봐~

전화를 끊고는 난 기분이 파악 다운됐다. 집 앞에 차를 세웠는데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뭐야. 오늘은 내가 늦게 밖에서 놀구, 넌 집에서 조용히 티비보면서 날 기다려야 하는 날이었는데.. 자기가 더 재밌게 놀구 있잖어. 나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 싫어. 힝… ‘ 결국 난 S에게 전화해서 그리로 가겠다고 통보하고는 쌩 달려갔다. S와 몇몇 친구들이 있는 바로 걸어가서 바로 바카르디 105 럼을 원샷했더니 S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S: 왜 그래? 기분 나쁜 일 있어?
나: 그래. 기분 나뻐.
S: 왜?
나: 니가 나보다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잖어. 오늘은 내가 더 재밌게 놀아야 하는 날인데 말야.
S: 뭐?? (어이없어 하는 표정)

그 날 난 확실하게 알았다. 나 없이 S 혼자 예상치 않았던 재미를 누리는 것을 난 못참고 그걸 질투한다는 걸.
그리고 며칠 전의 일로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됐다. S 혼자 맛있는거 먹는 것도 질투한다는 걸. 아..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런 나의 유치함을 이젠 S도 잘 이해주니 다행이다.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와서.. 우린 운동하러 가는 대신 동네 산책을 했다. 그리고 산책을 하던 중 맥주집에 들러 한 잔 했다. 그렇게 내 유치함을 알아주는 남편이 사준 맥주와 데이트는 나의 우울짜증 모드를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