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결혼식은 4월이지만 그 전에 법적으로 부부가 되기 위한 모든 절차를 마치기로 결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영주권 수속을 미리하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어차피 해야할 법적 절차를 미리 해버리면 결혼식 뒤에 귀찮은 일을 하나 덜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미국은 주마다 결혼관련 법이 달라서 결혼절차도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내가 사는 주에선 결혼을 하려면 우선 결혼 허가증 (Marriage License)를 받아야 한다. 지난 주 수요일, 퇴근 후에 S와 만나 한국으로 치면 구청같은 카운티 법원에 가서 결혼 허가증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신청서를 제출하면 바로 허가증을 주는 것이 아니라 3일 후에 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그 이유는 커플들이 결혼 허가증을 신청한 뒤에 마음이 변해 취소하려고 하는 선례가 많아 3일이라는, 말하자면 ‘이 사람과 정말 결혼하고 싶은지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라’는 유예기간을 둔다는 얘기였다. 3일안에 취소하면 아무런 법적절차 없이 취소가 간단하지만, 일단 결혼 허가증이 발급되면 공문서에 기록이 남기 때문이다.

결혼 허가증.. 대충 이렇게 생겼다


결혼 허가증을 받으면 그 카운티의 아무 판사에게나 가서 결혼 허가증에 사인을 받고 판사는 그 허가증을 다시 법원에 제출한다. 그것으로 법적인 모든 결혼 절차는 끝이고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부부가 된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판사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S는 결혼하기로 한 전 날, ‘내일이면 우린 부부야. 실감이 나니?’, ‘오늘이 약혼자로서의 마지막 밤이야.’, ‘내일이면 유부녀가 되는데 안 떨려?’, 등등 계속해서 마치 자기가 믿기지 않아 스스로를 세뇌하려는 듯,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난 솔직히 별로 떨리지도 않았고, 결혼한다고 뭐 크게 달라질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같이 산지도 꽤 되었으니 지금 결혼한다고 해서 생활에 변화가 생길 것은 전혀 없을테니 말이다.

드디어 결혼을 하기로 한 금요일. 판사의 사무실에 정시에 도착했는데 판사가 조금 늦으신다고 기다려 달라는 비서의 말. 대기실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그 곳에서 결혼을 하고 난 뒤에 바로 찍은 커플들의 사진들이었다. S와 나는 혹시 우리가 아는 사람은 없을까 하고 사진들을 하나 하나 보기 시작했는데, 앗, 내가 아는 사람이 두 명이나 그 사진들 속에 있는게 아닌가. 정말 이곳에 오래 살긴 살았구나..

선남 선녀 커플도 있고, 추남 추녀 커플도 있고, 도저히 커플로 보이지 않는 미녀와 야수 커플도 있고, 커플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하나같이 미소를 머금거나 활짝 웃는 얼굴들이었다. 다들 행복해보이는 모습이었다. 나와 S도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사진을 남겨야 할텐데 하는 괜한 걱정도 들었다.

판사가 도착하고 잠시 후 우리를 작은 법정같은 방으로 불러들였다. 이 곳에서 근 30년을 재직한 나이가 70 정도로 되어보이는 근엄한 얼굴의 판사님이었다. 우리에게 개인적인 질문들 – 어디 출신이냐, 무슨 일을 하냐, 둘이 어떻게 만났냐, 등등 – 을 몇 가지 던지시고는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판사님이 하신 말씀들 중 기억에 남는 부분을 적어보면…

“결혼은 물론 두 사람 간의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사랑하는 마음에 더해 두 사람은 서로를 한 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합리적으로 대해야 한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항상 옳거나 항상 그를 수는 없다. 서로 의견 충돌이 있고 싸울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이는 그런 충돌을 현명하게 해결하기 힘들다.

이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요즘 젊은이들은 한편으로는 행운이다. 왜냐하면 어떤 결혼은 진정으로 유지할 가치가 없고 그럴 때엔 이혼하는 것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그래서 결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결혼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결혼한 뒤에도 두 사람은 독립적으로 완전한 개인이어야 하지만, 이젠 부부, 가족이라는 또다른 하나의 객체를 형성하는거다. 두 사람이 함께 발전하고 서로의 발전을 위해 성심성의껏 도와주어야 두 사람이 형성하는 객체도 발전하는거다.”

그리곤 우리에게 물으셨다.
“두 사람의 가족 친지들과의 결혼식이 아직 남아있지만, 오늘 이곳에서 올리는 결혼식 만으로 두 사람은 진정한 부부가 되는거다. 이 곳을 떠나는 순간부터 두 사람은 법적으로 모든 효력이 인정되는 부부관계인거다. 자… 그래도 두 사람은 결혼하겠다는데에 동의하는거지?”

네.. 했더니 둘이 마주보고 두 손을 잡으라신다. 그리곤 자기가 하는 말을 S보고 따라하라고 하신다. 똑같은 말을 나에게도 따라하고 하신다. 그 말은 대충 이런 말이었다.

내 사진은 아니구.. 우리도 이런 비슷한 분위기에서 결혼을 했다.


“나, S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 평생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항상 그대 곁에 함께 하며 당신의 지원자가 되어 줄것입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엔 무덤덤하던 내 마음도 찡해지더니 눈물이 핑 돌았다.

썰렁하고 굉장히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던 판사 앞에서의 결혼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기억에 남는 결혼식이었다. 오히려 결혼식장에서의 결혼식보다 오래 오래 내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끝으로 판사는 자신의 37년 결혼생활에서 얻은 교훈이라면서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비결을 알려주셨다.

“이건 특별히 S, 자네에게 중요한 조언이야. 웬만한 경우엔 아내 말을 따르게. 웬만한 경우엔 아내 말이 옳거든. ”

난 이 판사님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