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10년 가까이 다니던 전직장에서의 마지막 주였다. 이것저것 마무리하느라 좀 정신이 없던 오후에 S의 전화를 받았다.

S: 난데.. 지금 병원 응급실에 가는 길이야.
나: 왜??? 무슨 일이야?
S: 오늘 정기검진 받으러 주치의한테 가기로 한 날인데 아침부터 배가 아프잖어. 배를 끌어안고 병원에 갔더니 맹장일지 모르겠다고 응급실에 당장 가보라고 해서..

나는 맹장수술을 한 적이 없지만, 주변에서 맹장수술을 했던 사람들이 일주일도 안되어 회복되서 멀쩡했던 기억이 나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주일 뒤에 한국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수술 때문에 장거리 비행기 여행은 하면 안된다고 의사가 그러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깝깝해지기 시작했다.

맹장인지 아닌지는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해서 그럼 검사결과가 나오는대로 알려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날 저녁엔 오랫만에 여자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약속을 취소하긴 싫고, 병원엔 가봐야 할 것 같고.. 몇 시간 동안 걱정과 약간의 짜증이 머릿 속에서 오락가락했다.

퇴근 할 시간에 다시 전화를 했다.

나: 검사 결과 나왔어?
S: 아니 아직. CT Scan 하고 기다리는 중이야.
나: 많이 아퍼?
S: 진통제를 맞아서 지금은 괜찮은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어…
나: (내심 오지 말라고 하길 바라면서…) 지금 병원에 갈까?
S: 정말? 와주면 나야 좋지만… 와서 할 일도 없구 심심할텐데…
나: (음… 오라는 얘기군.) 아냐.. 지금 당장 갈께.

가는 차 안에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약속을 취소했는데, 친구들의 다 ‘당연히 병원에 가봐야지’ 하는 반응에 내가 너무 못된 여자친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 집안이 워낙 건강체질이어서 누가 아파도 ‘좀 저러다가 낫겠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자라온 나여서 아픈 사람 곁에서 있어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려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전화로 들린 힘 없던 S의 목소리가 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병원 응급실이란 곳에 생전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ER 같은 드라마에서 보던 시끌벅적 정신없는 응급실의 이미지와는 딴판으로 조용하고 깨끗했다. S가 있는 방에 살며시 들어서는 순간,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그가 무척이나 작아보였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S의 손을 잡고 침대 옆에 앉아 있는 동안 네 시간이 흘렀다.

S: 와줘서, 그리고 이렇게 오래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정말 사랑해.
나: 나두 사랑해…
S: 엄마한테 말해놨는데.. 혹시 내가 어떻게 되면 우리 엄마가 널 돌봐주실거야.
나: 무슨 소리야. 그런 일은 없을거야.
S: 나도 그런 일은 없을거라고 믿지만, 만약의 경우에 말이지…
나: (훌쩍훌쩍)… 왜 이렇게 검사결과가 안 나오는거야… 혹시 암 같은건 아니겠지?
S: 설마..

S의 손을 잡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느꼈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사랑하는구나. 어떻게든 내 곁에만 있어줄 수 있으면 더 바랄게 없겠어.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있어도 좋겠어.

S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있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의사선생님이 들어왔다. CT Scan, 혈액검사, 소변검사 결과 S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다. 아니, 아무 곳에도 문제가 없는데 왜 아픈거지? 차라리 어디가 문제다라고 확실하게 찝어주면 더 속이 편할것 같았다. 세 명의 의사들과 비슷한 질문 답변을 주고 받은 끝에 하룻밤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통증이 계속되는지를 보기로 했다. 병실에 S를 남겨두고 집에 오니 12시가 넘었다. 몸은 엄청 피곤했지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전화로 들리는 S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통증은 조금 가라앉은 것 같다고. 다시 무슨 검사를 할 것 같다는데 아직은 그냥 누워 의사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오후가 되어 다시 전화가 왔다.

S: 의사가 그러는데 퇴원하래.
나: 퇴원해도 괜찮은거래? 왜 아픈지 알아낸거야?
S: 어… 의사들 말이 아무래도 배에 가스가 너무 차서 그런거 같대…

가 스 ???

아니 가스가 차서 그렇게 아플 수가 있다고?
물어보니 그럴 수 있단다.
심각한 병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위나 장기능에 이상이 있어 가스가 차서 그런 것 같다고 변비에 좋다는 섬유질 약을 먹으라는 것이 의사의 처방이란다. 그리고 내과 의사에게 찾아가 보라고.

큰 병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고 한국에 가는 것도 취소하지 않게 되어 기뻤지만, 잠시 숨을 돌리고 나니.. 뭐야.. 맨날 방귀끼고 트름할 때 그렇게 병원가보라고 했건만.. 이럴 줄 알았다 알았어… 그것도 모르고 둘이 손붙들고 앉아 그 쇼를 했으니…

나중에 S와 그 순간을 돌이키면서 깔깔댔다. “그렇지만 내가 그 때 한 말들은 다 진심이야.” 라는 S. 그래, 살면서 이런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정말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가스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랑을 확인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