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친구는 한번 결혼한 적이 있는 이혼남이다. 그를 소개해 준 친구로부터 그가 이혼남이란 얘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좀 꺼림칙하긴 했지만, 요즘 세상에 이혼 한 번 한 것이 대수도 아니고 친구가 그를 엄청 칭찬하는데 솔깃해져서 ‘그래 뭐, 만나는게 뭐 힘든가’ 하는 생각으로 만났다. 그와 지금 이렇게 알콩달콩한 관계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나는 남자의 과거에 대해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내 나이에 오히려 과거가 없다면 이상하지, 몇 번의 깊은 연애 경험이 있는 것이 더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전부인에 대해 어쩌다가 언급할 때도 별로 껄끄럽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어쩌다가 옛 남자친구 얘기를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그건 우리 둘다 과거는 다 지나간 일이고 중요한건 현재와 미래라는 것에 100프로 동의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그의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전부인의 흔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찬장을 열면 오랫동안 안쓰고 처박아 둔 것처럼 보이는 그릇이며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나: 이게 다 뭐야? 쓰는거야?
그: 아니. 아마 엑스걸거야. 나가면서 다 버리고 갔어.
나: 그런데 아직도 이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거야?
그: 정리하려면 귀찮아서.. 그냥 뒀어… 이번 기회에 같이 정리할까?

그걸 시작으로 그와 나는 그의 전부인이 버리고 간 정말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가차없이 버리기 시작했다. 그가 과거있는 남자라는 것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흔적을 하나둘씩 없애는 것은 역시 기분좋은 일이었다.

이 주일 전엔 책장 정리를 하던 그가 처박아 두었던 결혼앨범과 사진들을 끄집어 냈다.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거기 있는지 몰랐어. 버린 줄 알았는데. 으이그.. 정말이지 내 남친의 기억력은 꽝이다. 어쨋거나 앨범과 사진박스를 들고 있는 그에게서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다. 나도 잠시 망설였다. 나라면 이혼을 했다지만 결혼사진을 다 버리고 싶을까? 그래도 한 번 뿐인 추억인데…

몇 초 간의 망설임 후 그가 사진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이렇게 하자. 이 사진들 중에서 내 엑스가 있는 사진은 다 버리고 가족들이나 친구들 사진만 뽑아놓자.”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 날 그렇게 또 한뭉탱이의 흔적들이 사라졌다.

지난 주엔 내가 그의 집에서 가장 싫어했던 공간인 화장실이 탈바꿈했다. 그의 화장실은 그의 엑스가 좋아했다던 오리로 가득차 있었다. 오리 샤워커튼, 오리 고무인형들, 오리 비누그릇, 오리 발판. 내 집이 아니라 당장 바꾸라고 하기도 뭐했지만, 그에게 종종 핀잔을 주긴 했다. 그랬던 화장실에서 드디어 모든 오리들이 사라졌다!! 난 그가 오리들을 화장실에서 몰아낸 날, 그에게 정말로 감사했다.

이젠 전부인의 흔적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아마도 마지막 남은 것은 그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 그건 그가 간직하고 싶은만큼 간직하도록 내버려둘거다. 나도 내 엑스들의 사진을 아직 가지고 있지만, 사진을 다시 본다고 감정이 되살아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진을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젊었구나 하는 생각이 주로 들 뿐이지. 그도 젊었을 때 젊은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때를 잠시 회상하게 되겠지만, 가끔씩 그런 시간도 없으면 사는게 너무 무미건조하지 않을까.

결국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는데 말이지.